친구 집에서 자고 온 날의 약
'자고 가'라는 말이 반가우면서도, 머릿속으로는 가방 속을 뒤지고 있었습니다.
오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얘기가 길어졌어요. 막차 시간이 지나고 친구가 이불을 꺼내 주더라고요. 고마운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. 자기 전 약은 가방에 여분이 있었지만, 다음 날 아침 약은 없었어요.
예전의 저라면 핑계를 대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갔을 거예요. 약 얘기를 꺼내는 것보다 택시비가 덜 아까웠으니까요.
그런데 이 친구는 10년 지기고, 제가 병원 다니는 것도 어렴풋이 알아요. 그래서 그냥 말했습니다. '나 아침에 먹는 약이 있는데 안 가져와서, 내일 일찍 가야 할 것 같아.'
친구가 '아 그래? 몇 시에 먹는데?' 하더니 알람을 같이 맞춰 줬어요. 그게 다였어요. 무슨 약이냐고 묻지도 않았고, 표정이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.
밤에는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자기 전 약을 먹었어요. 그건 아직 눈앞에서 먹을 용기가 없었거든요. 한 번에 다 열어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요.
다음 날 아침 여덟 시에 나왔습니다. 평소보다 조금 늦게 먹게 됐는데, 그런 경우 어떻게 하는지는 전에 주치의 선생님께 제 약 기준으로 여쭤 둔 게 있어서 그대로 했어요.
이번 일로 가방 속 여분에 아침 약도 하루 치 넣어 뒀어요. 그리고 '약이 있어서'라는 말을 입 밖에 내 본 게 제일 큰 수확이에요. 생각보다 가벼운 문장이었습니다.
※ 운영팀이 만든 글이에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