밥솥 취사 버튼을 안 눌렀습니다
40분을 기다렸는데 뚜껑을 여니 쌀이 물에 잠겨 저를 보고 있었어요.
오늘은 제대로 된 저녁을 먹겠다고 마음먹은 날이었어요. 일주일 내내 배달이랑 컵라면이었거든요. 퇴근길에 마트 들러서 두부, 계란, 김치찌개용 돼지고기까지 샀어요. 큰맘 먹은 거예요.
집에 와서 쌀 씻어서 안치고, 찌개 끓이고, 계란말이도 부쳤어요. 계란말이가 처음으로 안 찢어져서 혼자 감탄도 했고요. 상을 다 차리고 밥솥을 열었는데.
쌀이었어요. 밥이 아니라.
보온 불만 켜져 있더라고요. 취사를 안 누른 거예요. 찌개는 식어 가고, 계란말이는 굳어 가고, 저는 밥솥 앞에 서서 한참 있었어요.
예전 같으면 여기서 '나는 왜 이 모양이지'로 시작해서 회사에서 한 실수, 3년 전에 한 말실수까지 줄줄이 끌려 나왔을 거예요. 밥 한 번 못 한 걸로 인생 전체를 재판하는 버릇이 있거든요.
근데 오늘은 좀 웃겼어요. 쌀이 너무 말짱하게 저를 보고 있어서요. '아, 버튼을 안 눌렀구나'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어요. 그게 사실의 전부니까요.
취사 누르고, 기다리는 동안 찌개에 계란말이만 먼저 먹었어요. 밥은 30분 뒤에 김에 싸서 2차로 먹었습니다. 코스 요리였다고 치려고요.
다들 오늘의 소소한 실패 하나씩 놓고 가세요. 제 밥솥이 외롭지 않게요.
※ 운영팀이 만든 글이에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