병원 수련 첫 달, 보고서가 온통 빨간 줄
제가 쓴 문장이 하나도 안 남고 돌아왔어요.
석사 졸업하고 이번 가을부터 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했어요. 첫 달은 주로 선생님들 검사하시는 걸 참관하고, 심리평가 보고서를 연습으로 써서 슈퍼비전을 받아요.
첫 보고서를 사흘 걸려 썼어요. 나름 대학원에서 평가 수업도 잘 들었고 실습도 했으니까 기본은 하겠지 싶었는데, 돌아온 보고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빨간 펜이었어요. 문단 하나가 통째로 엑스 표시된 것도 있었고요.
제일 많이 받은 지적
- 자료 없이 해석함: 검사 수치나 행동 관찰 근거 없이 '~한 것으로 보인다'를 남발
- 교과서 문장을 그대로 옮김: 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론
- 검사끼리 따로 놂: 지능검사 따로, 성격검사 따로 써서 한 사람으로 통합이 안 됨
- 읽는 사람을 생각 안 함: 의뢰 사유에 대한 답이 보고서 어디에도 없음
네 번째가 제일 아팠어요. 의뢰하신 분이 궁금해한 건 따로 있는데 저는 제가 아는 걸 다 쓰는 데만 바빴던 거예요.
집에 와서 좀 울적했어요. 2년 넘게 공부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요. 그런데 동기도 똑같이 빨갛게 돌아왔다고 하고, 2년차 선생님이 자기 첫 보고서는 더했다면서 보여 주셨어요. 진짜 더했어요 ㅋㅋ 그게 큰 위로였습니다.
지금은 쓰기 전에 '의뢰 질문이 뭐였지'를 맨 위에 적어 놓고 시작해요. 두 번째 보고서는 빨간 줄이 조금 줄었어요. 조금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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