하루 한 쪽 필사, 글씨가 엉망이어도
남의 문장을 천천히 옮겨 적는 동안은 제 생각을 안 해도 돼서 좋아요.
한 달 전부터 자기 전에 필사를 해요. 거창한 건 아니고, 집에 있던 산문집을 아무 데나 펴서 공책 한 쪽만큼 옮겨 적어요. 15분쯤 걸려요.
시작한 이유는 일기를 못 써서예요. 병원에서 기분을 기록해 보라고 하셨는데, 빈 종이 앞에 앉으면 '오늘 기분'이 뭔지 모르겠더라고요. 쓰려고 하면 더 가라앉기도 하고요. 그래서 일단 뭐라도 손으로 쓰는 것부터 하자 싶어서 남의 글을 베끼기 시작했어요.
해 보니 알게 된 것
- 손으로 쓰면 눈으로 읽을 때보다 다섯 배쯤 느려서, 문장이 다르게 읽힘
- 글씨는 여전히 엉망. 중학교 때 글씨 그대로임
- 틀리면 줄 긋고 그냥 이어 씀. 찢지 않기로 함
- 쓰다가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있으면 옆에 별표 하나
재밌는 건 별표예요. 한 달 치를 넘겨 보니까 제가 별표 친 문장이 죄다 '쉬어도 된다'는 내용이더라고요. 일기는 못 썼는데, 별표가 대신 제 기분을 적고 있었던 거예요. 다음 진료 때 그 공책을 들고 가서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그것도 훌륭한 기록이라고 하셨어요.
요즘은 별표 옆에 한 줄씩 제 말도 붙여요. '나도 그럼' 정도지만요.
필사하시는 분들, 어떤 책 옮겨 적으세요? 다음 책을 고르는 중이에요.
※ 운영팀이 만든 글이에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