냉장고 맨 아래 칸 발굴 작업 후기
냉장고 채소 칸을 여는 게 무서워서 한 달을 미뤘습니다.
뭐가 들어 있는지 대충은 알았어요. 사 놓고 못 먹은 애호박, 반쯤 쓰다 남긴 대파, 그리고 정체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봉지 몇 개. 문을 열 때마다 그 칸은 못 본 척하고 위쪽 칸에서 달걀만 꺼냈어요.
이게 단순히 귀찮아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. 그 칸을 열면 '장을 봐 놓고 해 먹지 못한 나'를 마주해야 하니까요. 요리해 먹겠다고 의욕 있게 사 온 날의 제가 있고, 그 뒤로 배달만 시킨 제가 있고. 그 사이의 간격을 확인하기가 싫었어요.
오늘 드디어 열었습니다. 고무장갑 끼고, 음식물 봉투 옆에 두고요.
- 애호박: 형체를 잃음. 조용히 보내 드림
- 대파: 끝이 말랐지만 가운데는 멀쩡해서 썰어서 냉동
- 당근 두 개: 놀랍게도 무사. 당근은 강하네요
- 두부: 날짜가 한참 지남
- 소스 병 세 개: 뚜껑에 적힌 날짜를 보고 깜짝
다 꺼내고 칸을 물로 씻어서 말렸어요. 텅 빈 채소 칸이 그렇게 깨끗해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.
버리면서 자책이 올라오긴 했어요. 아깝다, 돈 버렸다, 왜 이러고 사나. 그런데 중간에 생각을 좀 바꿨어요. 못 먹고 버린 건 이미 지난 일이고,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건 치우는 일이니까요. 치우는 사람한테까지 뭐라고 할 건 없잖아요.
정리하고 나서 냉장고 문 안쪽에 메모지를 하나 붙였어요. 지금 채소 칸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적어 두는 용도로요. 문을 열지 않아도 뭐가 있는지 알면, 그 칸이 다시 '못 본 척하는 칸'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.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요.
살아남은 당근 두 개로 저녁에 카레를 했습니다. 당분간은 채소를 한 가지씩만 사려고요. 다들 냉장고 정리는 얼마 만에 하세요?
※ 운영팀이 만든 글이에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