내년 다이어리를 벌써 사 버렸습니다
올해 다이어리는 3월 둘째 주에서 멈춰 있는데 말이죠.
문구점에 볼펜 사러 갔다가 다이어리 매대 앞에서 20분을 서 있었어요. 해마다 반복하는 일입니다. 새 다이어리를 사면 새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분, 다들 아시죠.
올해 것을 꺼내 봤어요. 1월은 빽빽해요. 색깔 펜으로 구분까지 했더라고요. 2월은 절반. 3월 둘째 주 화요일에 '병원 3시'라고 적힌 게 마지막입니다. 그 뒤는 새하얘요.
빈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좀 씁쓸했어요. 그런데 생각해 보니 3월 그 무렵이 제가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때예요. 다이어리를 쓸 기운이 없던 몇 달이었던 거죠. 빈칸은 게으름이 아니라 제가 버티던 시간이었습니다.
그래서 내년 다이어리는 고르는 기준을 바꿨어요.
- 날짜가 인쇄되지 않은 것 (빈칸이 죄책감을 안 주게)
- 얇은 것 (다 쓸 수 있을 만큼)
- 하루 칸이 작은 것 (세 줄이면 꽉 차게)
날짜 없는 얇은 노트를 골랐어요. 쓰는 날에만 날짜를 적으면 되니까 건너뛴 날이 눈에 안 보여요. 3월에 멈춰도, 5월에 다시 시작하면 바로 다음 장이에요.
첫 장에는 아직 아무것도 안 썼습니다. 1월 1일을 기다릴까 하다가, 그냥 오늘 한 줄 적었어요. '볼펜 사러 갔다가 노트를 삼.' 내년 다이어리의 첫 문장이 올해 11월이라니,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.
※ 운영팀이 만든 글이에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