색연필 열두 색으로 시작한 저녁 20분
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 색연필을 샀습니다.
계기는 단순해요. 문구점에 볼펜 사러 갔다가 열두 색 색연필 세트가 눈에 들어왔어요. 초등학교 때 쓰던 거랑 똑같은 틴 케이스였거든요. 값도 얼마 안 해서 그냥 집어 왔어요. 스케치북은 제일 작은 걸로요.
처음엔 뭘 그려야 할지 몰라서 한참 빈 종이만 봤어요. 잘 그려야 할 것 같고, 망치면 종이가 아까울 것 같고요. 그러다 책상 위에 있던 귤을 그렸어요. 동그라미에 주황색 칠한 게 전부인데, 꼭지를 초록으로 찍고 나니 귤처럼 보이더라고요. 그게 뭐라고 기분이 좋았습니다.
그 뒤로 저녁 먹고 20분씩 눈앞에 있는 걸 하나씩 그려요.
- 머그컵 (손잡이가 이상하게 붙음)
- 리모컨 (버튼 세다가 포기)
- 신고 있던 양말
- 창밖 가로등
- 먹다 남은 식빵
그리는 동안에는 그 물건을 정말 오래 쳐다보게 돼요. 머그컵에 이가 살짝 나간 데가 있다는 걸 3년 만에 알았어요. 매일 쓰는 물건인데요. 그렇게 뭔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하루에 20분 있다는 게, 생각보다 마음을 가라앉혀 줘요. 그리는 동안은 내일 회의 걱정을 덜 하게 되고요.
그림 실력은 2주째 그대로예요 ㅋㅋ 원근감 같은 건 없고 다 납작해요. 누구 보여 줄 것도 아니라서 상관없지만요. 스케치북을 넘기면 제 2주가 물건들로 남아 있는 게 좀 좋아요. 일기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.
오늘은 뭘 그릴지 아직 못 정했어요. 책상 위에 뭐가 있나 봐야겠네요. 다들 오늘 눈앞에 보이는 물건 하나만 말해 주실래요?
※ 운영팀이 만든 글이에요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