냉장고 맨 아래 칸을 열어 봤습니다
석 달 동안 못 본 척한 그 칸이요.
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위 칸만 썼어요. 아래 야채 칸에는 뭐가 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했습니다. 여름에 산 오이가 있었거든요. 지금은 오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상태일 거라고 짐작만 했어요.
오늘 고무장갑을 꼈습니다. 큰 비닐봉지도 준비했고, 창문도 열었어요.
발굴 결과
- 오이였던 것 1
- 반쯤 쓴 대파 (끝이 말라서 종이가 됨)
- 유통기한 6월인 두부
- 소스 봉지 열일곱 개. 배달 음식에 딸려 온 것들
- 그리고 멀쩡한 사과 두 알. 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음
버리면서 좀 씁쓸했어요. 장 볼 때는 해 먹을 생각이었는데 기운이 없어서 못 한 날들이 이 칸에 쌓여 있는 것 같아서요. 석 달 치 '하려고 했는데'였어요.
그래도 칸을 꺼내서 물로 씻고, 마른 행주로 닦아서 다시 끼웠어요. 텅 빈 칸에 사과 두 알만 넣어 놨는데 그게 그렇게 깨끗해 보일 수가 없어요. 문을 세 번쯤 다시 열어 봤습니다.
다음 장 볼 때는 이틀 안에 먹을 것만 사기로 했어요. 미래의 나를 너무 믿지 않기로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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